“스포츠 비리 만연…비리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빠떼루 줘야 해”

 

▲ 빠데루 아저씨 김영준 교수/ 자료사진=시사연합신문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저 선수 빠떼루 줘야합니다”, “머리채를 잡아야죠” 등 수 많은 어록을 탄생시키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 있다. 이와 함께 비인기 종목이었던 레슬링은 단숨에 인기 종목으로 떠오르며,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됐다. 20여년간 구수한 입담으로 레슬링 중계를 하고 14년간 교편에 서 제자 양성에 힘을 쓴 김영준 교수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어떠한 계기로 레슬링에 입문하게 되셨는지요?

어렸을 때부터 유도, 태권도 등 다양한 종목의 운동을 좋아했지만 레슬링은 고향 선배의 권유로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2학년 때에는 전국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해 전국체전에서 2등을 기록하기도 했구요. 이후 한양대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레슬링에 대해 공식적으로 규정된 룰과 규정이 나라별로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참 많았지요. 통역이 가능한 스텝이 없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경기에 참가하기 바로 직전에 대회 규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정도로 우리 선수들이 메달을 딸 수 있는 환경적 기반이 열악했습니다. 또 당시 선수들이 입국 문제나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가족분들은 교수님께서 운동을 한다는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이었는지요?

고향은 전북 부안이고, 8남매 중 장남인데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레슬링을 하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아하셨어요. 국가대표를 마칠 때까지 시합 한 번을 오신 적이 없었으니까요. 아버지께서는 장남인 제가 공부를 해서 면사무소 서기를 하는 것을 바라셨는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운동만 하니까 굉장히 못마땅해 하셨죠. 하지만 선수 생활 당시 메달을 따면서 자연스럽게 사이가 좋아졌어요.

레슬링 선수들의 귀가 ‘만두 귀’로 불리우는 이유에 대해 궁금합니다.

레슬링 선수들은 레슬링을 시작하고 5~6개월이 지나면 격한 운동으로 인해 귓속에 있는 실핏줄이 터지고 혈액이 굳어져 귀 모양이 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수들의 귀가 거의 다 딱딱하게 굳어져 만두 모양처럼 말려들어갔다고 해서 ‘만두 귀’라고 부르기도 하구요. 이를 두고 옛날에는 “귀가 못 생길수록 연습을 많이 한 선수”라며 훈장처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지금 선수들이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초기에 치료만 잘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는데 당시에는 병원에서도 치료방법에 대해 잘 몰랐던 거죠.

현역시절 왕성한 활동을 하셨는데 힘드셨던 기억이 있다면?

태극기 마크를 달고 국가대표 선수로 총 9년을 활동했습니다. 1970년 방콕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딴 것을 시작으로, 72년 뮌헨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선수로 활동을 했구요. 뮌헨올림픽 당시에는 경기장에 가서야 대회 규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 상당히 곤란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레슬링에 대한 규정이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아 참 힘들었습니다. 대회 규정이 바뀐 사실을 경기 참가 바로 직전에 알았다는 것은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죠.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낸 84년 LA올림픽에서 감독을 맡아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LA올림픽에서는 유인탁, 김원기 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당시 유인탁 선수가 저를 업고 경기장을 돌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개인적으로 바람직한 지도자란 선수들에게 항상 모범이 되고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분만 더 먼저 실천하고 부지런하게 행동한다면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거든요. 운동을 할 때나 지금이나 항상 이런 마인드로 생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수 생활 은퇴 후의 근황에 대해 궁금합니다.

선수로 활동할 당시에도 공부는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한문에 관심이 많았고, 천자문, 명심보감에 대해 공부를 하기도 했구요. 선수시절이나 지금도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운동선수들이 운동에만 올인을 하는 경우 부상을 당하거나 은퇴 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봤습니다. 운동에만 모든 것을 쏟아 붓기 때문인데, 참 안타깝죠. 앞날을 생각할 때 운동만 그렇게 해서는 안되거든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태릉선수촌에 가서도 선수들에게 신문을 보라든지, 영어를 배우라든지, 책을 읽으라는 등의 말을 항상 달고 살았습니다. 운동 외에 하나만 집중적으로 배우라고 가르쳤어요.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후배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은퇴 후 주택공사 홍보 실장으로 입사해 27년간 재직함과 동시에 20여년을 방송 3사에서 레슬링 중계 해설을 했습니다. 또 경기대학교 교수로 교편에 서서 14년을 제자 양성에 힘썼으며, 정년퇴임을 한지는 2년 반 정도 된 것 같습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당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보다 더 유명세를 타셨는데, 논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는지?

당시 국내의 모든 시대적인 상황이 온갖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이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해설자들의 중계는 항상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문교부 표기법상 파테르라는 표현을 써야 하고, 무조건 표준말을 써야만 했죠. 선수생활 은퇴 후 스포츠 중계방송을 20년간 했는데 처음에는 ‘빠떼루’라는 말이 논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프랑스식 심판교육을 받았는데 분명히 ‘빠떼루’라고 배웠거든요. 해설을 할 때는 방송 3사 중계를 거의 도맡아서 하곤 했는데, 하루 종일 좁은 박스에 들어가 해설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빠떼루’라는 말이 나오게 된 거죠. 일부러 “그렇게 말 해야겠다” 이런 건 없었어요. 그런데 중계가 나가고 MBC에서 징계를 내리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됐어요. 징계를 받을 각오를 하고 귀국을 했는데 공항에 들어서니 수많은 인파와 함께 ‘빠떼루 아저씨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더라구요. 국민들 사이에서 ‘빠떼루’라는 말이 등불처럼 번지게 된 것 같아요. 일각에서는 ‘빠떼루’라는 말을 일본식 발음이라고 주장하기도 해서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한 불어 전공 교수가 parterre에 근접한 발음이 ‘빠데루’가 맞다는 내용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빠떼루’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많은 곤혹을 치르기도 했었죠. 중계 해설을 한 뒤 많은 활동을 하며 스포츠 선수 중에서는 최초로 공식 팬클럽도 생겼어요. 하지만 당시 주택공사를 재직하던 때라 6개월 뒤 공식적으로 해체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는데, 금전적 후원이 없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식으로 개최돼야 한다고 보시는지?

세상이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스포츠나 올릭픽은 특히 경제적인 후원이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습니다. 이를 기업들이 하지 못한다면 국가가 나서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은 당연히 메달을 안겨주는 것인데, 그것을 소홀히 여기면 안됩니다. 국민들이 메달로 인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희망을 주기 위해 기업들이 하지 못하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하는 역할이 아닌가요.

최근 스포츠 비리가 공공연히 발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스포츠를 단순히 운동으로만 보지 않고 먹이사슬로 여기며,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혹이 많아졌다고 할 수 있겠죠. 스포츠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강력하게 ‘빠떼루’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개인적으로 금메달은 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경제적인 후원과 정보교환, 선수들의 교육, 자국이 올릭픽을 유치할 수 있는 재정적인 요소가 뒷받침 돼야 선수들도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있습니다. 선수들이 많은 경기에 참가해 다양한 교육과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 여러 나라와 다양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합니다. 또한 자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선수들도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현재도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계신데 비결이 따로 있으신가요?

지금도 6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습니다.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구요. 현재는 편하게 옛날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취미활동도 즐기며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림이나 도자기 등에도 관심이 많구요. 최근에는 부안군청에 도자기 9점을 기증했는데, 좋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면 언제든지 기증을 할 의사가 있습니다. 일평생 운동을 하며, 많은 일을 하고 사회에 공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제자들이 저의 고향인 전북 부안에 ‘어록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참 뿌듯하기도 합니다.

직업 : 정치인, 스포츠해설가, 레슬링선수
출생일 : 1948년 3월 21일
소속 : 경기대학교 교수
학력 : 영생고등학교(전북) - 한양대학교 - 한양대학교경영대학원 - 경기대학교대학원

경력사항
1970년 방콕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선수
1972년 대한주택공사 홍보실장
1972년 뮌헨 올림픽 국가대표선수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선수
1980년 대한레슬링협회 감사
1980년 국제레슬링연맹 FILA 국제심판
1982년 경기지도자 2급
1984년 LA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
1986년 KBS 해설위원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KBS 레슬링 해설가
1988년 대한레슬링협회 이사
1988년 서울 올림픽 참가 KBS 레슬링 해설가
1991년 아시아레슬링선수권대회 선수단 단장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참가 KBS 레슬링 해설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참가 KBS, MBC, SBS 레슬링 해설가
1996년 현재 뉴한벗 라이온스 클럽 회장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참가 KBS, MBC, SBS 레슬링 해설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TV 연설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정치특보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KBS 레슬링 해설가
1998년 경기대학교 체육학부 겸임교수
1998년 스포츠리서치 평생회원
1998년 한국체육과학회 부회장
1998년 21세기스포츠포럼 회원
1998년 한국행정,경영학회 평생회원
1998년 한국체육학회 평생회원
1998년 현재 한국학교체육학회 부회장
1999년 KBS 스포츠 해설위원회 회장
1999년 21세기 국가경영연구회 이사
1999년 재경 전주 영생중고 총동문회장
1999년 제8회 일.한 건강교육심포지엄 겸 제47회 일본교육의학회 대회참여위원
1999년 제8회 일.한 건강교육심포지엄 논문발표
2000년 현재 경기대학교 총동문회 부회장
2000년 국민대학교 스포츠산업대학원 강사
2000년 시드니 올림픽 KBS 레슬링 해설가
2001년 경기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원 교수 재중
2001년 제10회 한.일 건강교육심포지엄 논문발표
2002년 세계 한민족공동체 재단 상임이사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KBS 해설위원
2002년 전북체육인모임 회장
2003년 경기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원 교학부장
2003년 대한 레슬링협회 부회장
2003년 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2004년 경기 고양-일산을 총선 출마

수상경력
2002년 체육상 연구상 수상(대한체육회)
1984년 체육훈장 맹호장
1996년 전북대상(전북일보사 체육부문)
1984년 체육훈장 맹호장
1982년 표창장(체육부장관)
1970년 대통령 표창


 

저작권자 © 시사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