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뿐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1972년 발표된 국민애창곡 고향역은 가수 나훈아의 대표곡이자, 무명 작곡가이던 임종수 씨를 단숨에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작곡가 임종수 씨는 이후 태진아의 ‘옥경이’, 남진의 ‘모르리’,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 등 300여곡의 히트곡을 작곡했으며, 15년간 KBS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을 맡아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는 자신의 인생과 노래 이야기를 담은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2010년부터는 익산시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올해나 내년께에는 익산시에 ‘고향역 노래비’가 세워질 것으로 알려져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작곡가 임종수 씨를 만나 인생과 노래 이야기가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 시사연합신문

가요계에 입문하신지 어느덧 50년이 넘으셨는데, 어떠한 계기로 작곡을 하게 되셨는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가수가 꿈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TV에 나오는 노래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따라 부르곤 했는데, 내 노래를 갖고 무대에 오르는 날만을 꿈꿨던 거죠. 그러던 중 26살에 작곡가 나화랑 선생님를 통해 ‘호반의 등불’이라는 곡을 받아 데뷔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수를 꿈꾼다고 해서 누구나 가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노래할 때의 음색이나 창법, 기교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나 가정 형편 등의 외적인 요소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러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춰도 가수가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데, 당시 시대적 흐름과도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수와는 연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한 거죠. 마침 나화랑 선생님께서도 작곡을 하라고 권유를 하셨고 그 길로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가수 나훈아의 '고향역'이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셨는데, 곡 작업을 하실 때만 해도 이 곡이 히트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 하셨는지?

그렇게 잘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전혀 예상을 못했죠(웃음). 나훈아 씨는 지금도 최고의 톱스타이지만 1970년 당시 인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작곡가로써 나훈아 씨에게 곡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3개월을 쫓아다녔어요. 그러던 중 기회가 생겨 1970년대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찾아가 나훈아 씨에게 ‘차창에 어린 모습’이라는 곡을 들려주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취입을 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방송 한번 타지 못하고 금지곡이 되어버렸어요. 이후 나훈아 씨가 “멜로디는 좋은데 가사를 바꾸자”고 제안을 했으며, 가사도 새로 바꾸고 리듬도 고고리듬으로 편곡해서 1972년 고향역이라는 곡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역’은 타이틀곡이 아니었던 터라 크게 주목은 받지 못하다가, 오아시스 레코드사가 전국 방송국 PD들에게 선문 조사를 돌려 타이틀곡을 제외한 알려지지 않은 곡을 골라 달라고 했는데 ‘고향역’이 1위로 꼽혔어요. 이에 레코드사는 ‘고향역’을 타이틀곡으로 다시 앨범을 내게 되고 이 곡이 대히트를 치게 된 거죠. 개인적으로 이 곡이 가장 애착이 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예요.

남진의 '모르리', 故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태진아의 '옥경이'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하셨는데, 대중들에게 어떤 점이 통했다고 생각하시는지?

이전에는 가사를 보고 영감이 떠오르면 곡을 쓰는 편이었어요. 특히 만족할만한 가사가 아니면 곡이 잘 써지지도 않았고요. 그러던 중 작사가 김순곤 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은 멜로디를 들어야 작사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함께 작업한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와 박윤경의 ‘부초’가 대중들의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 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이전에 가사를 보고 작곡을 했다면, 그 때 이후로 작곡 스타일이 완전 변하게 된 거죠. 또 가수마다 스타일이 다 달라요. 태진아 씨의 ‘옥경이’ 같은 경우에는 원래는 곡 제목이 ‘고향여자’였거든요. 그런데 태진아 씨를 만나 본인이 미국에서 고생하고 있던 차에 아내를 만나 안정을 찾고 귀국을 하게 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마침 태진아 씨도 부인의 이름을 딴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고요.

 

▲ ⓒ 시사연합신문

음악을 통해 대중들에게 주로 전하고 싶은 주제나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음악은 진실과 진정성 있는 멜로디를 담고 있어야 해요. 노래를 부른 가수도 진정성을 갖고 노래를 불러야 하고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와 같은 곡의 경우도 진정성을 담아 내 아내에게 바친다고 생각하고 작곡을 하게 되었어요. 남진씨가 발표한 ‘모르리’라는 곡은 남진씨가 곡을 달라고 직접 찾아왔어요. 흔히 말해서 가수가 작곡가에게 곡을 달라고 왔을 때는 작곡가의 파워가 더 세죠. 하지만 노래를 주는 순간부터는 가수와 작곡가의 위치가 달라져버려요. 그때부터는 가수를 만족시키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는 거죠. ‘모르리’ 같은 경우도, “그냥 곡을 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다양한 연구를 시도한 끝에 전혀 색다른 노래가 탄생하게 되었거든요. 가사 안에는 항상 음률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또 7개음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다 보면 비슷한 음이 겹칠 수가 있는데, 지금까지의 히트곡을 쭉 들어보면 비슷한 음이 하나도 없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KBS 전국노래자랑' 심사를 15년이나 하셨는데.

전국노래자랑은 1980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38년이 된 장수프로그램 이예요. 제가 1회부터 15년 동안 혼자 심사를 했는데 이러한 장수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을 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커요. 전국노래자랑은 방송 프로그램 성격상 즉석에서 바로바로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하지만 당시에는 즉석에서 바로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저 밖에 없었거든요. 공식적으로는 1980년부터 1993년까지 심사를 했는데, 방송국은 계절에 맞춰 편성을 하죠. 그런데 바뀌는 PD들이 “선생님 조금만 더 해 주세요”하고 계속 요청을 하는 바람에 다시 맡고 한 것을 합치면 15년 정도 됐네요. 전국노래자랑은 사람 위주로 무대가 꾸며지기 때문에 출현하는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프로그램이 절대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봐요. 자원이 수도 없이 많으니 프로그램이 유지가 되는 거죠. 또 하나 전국노래자랑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팁 하나를 말해 드리자면, 최대한 신나는 무대 위주로 본인만이 할 수 있는 특색 있는 무대를 꾸며야 해요. 이것은 노래를 잘하던 못하던 상관이 없거든요. 아무리 노래를 잘 하더라도 똑같은 노래가 반복되고, 재미가 없으면 금방 식상해져 버려요. 본인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노래와 장기로 신나는 무대를 만들어 시민들의 한 주간의 스트레스를 풀어 줄 수 있다면 분명히 좋을 결과가 있을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꿈이셨는데, 가수의 꿈에 대한 후회는 없으신가요.

후회는 전혀 없어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기 때문에 가수의 꿈을 포기한 당시만 해도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했었거든요. 작곡가의 길을 권유해 주신 나화랑 선생님께 너무나 감사해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은 뒤 나화랑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는데, 저를 안고 펑펑 우셨어요. “노래 너무 잘 만들었다”, “너무 잘했다”고도 하셨고요. 지금은 다시 태어나도 작곡가를 선택할 것 같아요. 처음 작곡을 시작할 때 힘들기도 했지만 이런 저런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인생을 배운 것 같습니다.

현재 가요계 시스템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방송 시스템 상에서는 이전 같은 히트곡이 절대 나올 수 없어요. 당시에는 방송국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방송이나 라디오에서 음악 횟수를 제한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거든요. ‘고향역’이 히트하던 72년 당시만 해도 라디오에서 노래가 얼마나 흘러나왔는지 셀 수도 없어요. 라디오를 틀기만 해도 ‘고향역’ 노래가 흘러나오던 때였으니까요. 지금은 공중파에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무대가 많이 없다는 점이 아쉬워요. 고령층이 늘어나고 있는만큼 그 분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욱 많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많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거든요. 많은 어르신들이 보고 듣고 즐기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현재 익산에 노래비가 추진되고 있다고 하는데.

1942년 전북 순창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이리 (현 익산)로 이사를 간 뒤 이리에서 남성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당시 경찰관이던 형님을 따라 같이 생활을 했는데, 삼기면에서 산을 넘고 들녘을 지나 무려 20여리길을 걸어 황등역에 도착해 이리역(현 익산역)까지 한정거장 통학을 했어요. 헌데 새벽길에 매번 도시락을 쌀 수 있었겠어요. 도시락을 못 싸가는 날이 부지기수였죠.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길에 황등역 주변에 핀 코스모스를 보고 순창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 우는 날이 많았어요. 이 이야기가 ‘고향역’의 모티브가 된 거죠. 그때 황등역 주변과 기찻길주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와 순창의 어머니을 그리워하며 황등역에서의 느낌을 고향역에 담아 71년 고향역을 작사,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역의 모티브가 된 황등역과 익산역에는 올해나 내년쯤에는 노래비가 건립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작곡을 한다는 것이 직업으로써가 아니라 생활이 되었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있는 날까지는 작곡을 계속 할 것 같아요. 대중들의 생활 속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큰 효과적인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곡도 많이 만들고 싶고요. 개인적으로 우리 세대에 나이 드신 분들이 즐겁게 들을 수 있는 방송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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