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허진 씨는 1971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얼마 후 주연으로 급부상하며 신인상과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서구적인 마스크와 남성을 홀리는 뇌쇄적인 매력을 발휘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한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2003년 KBS 1TV 무인시대로 안방극장 복귀를 했으나 생활고 문제 등의 이유 때문에 2차 공백기를 가졌고 2013년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로 브라운관에 복귀한 이후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배우 허진 씨를 만나 최근의 근황과 그의 연기 인생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 시사연합신문

어렸을 때부터 끼가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 어떤 학생이셨는지요.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예체능이나 글짓기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는 무용을 했는데 전국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전국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린 글짓기 대회에서는 전국에서 4등을 차지해 학교지에 실리기도 했거든요. 그래서인지 당시에 ‘문학소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어요. 중·고등학생 때는 예체능에 관심이 많았는데, 무용 쪽으로 상을 많이 받다보니 무용과로 대학교 진학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몸이 너무 약한 탓이었는지 의사 선생님이 허리 쪽에 무리가 많이 간다고 무용을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무용과를 가려다 포기를 하고,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하게 됐죠. 그렇게 한창 대학교 생활을 하던 중 탤런트 김수미, 故김영애 씨와 같은 기수인 MBC 공채 탤런트 3기로 데뷔를 하게 됐어요. 연기를 시작할 당시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는데, 방송 일을 하던 친척 오빠의 반대가 상당히 거셌어요. 당시만 해도 배우를 ‘딴따라’라고 보는 시선들이 많았거든요. 결국 친척 오빠를 찾아가 집요한 설득을 한 끝에 허락을 받고 데뷔를 할 수 있었죠. 15년 공백기 후회되는 일 너무 많아”…“관객 공감할 수 있는 내 인생 대표작 만나고 싶다”

 톱 여배우로서 입지를 굳혀가던 당시 돌연 자취를 감추게 된 배경에 대해.

예전의 일을 생각하면 후회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방송 스케줄을 펑크 내기도 하고, 제작진에게 화를 내고 그랬던 것이 소문이 안 좋게 돈 것 같아요. 그 후로 일도 끊기고, 본의 아니게 긴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어요. 방송가 퇴출 이후에는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살아갈 이유를 잃고 방황을 참 많이 한 것 같고요. 인생의 전부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허무한 마음이 컸던 나머지 안 좋은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700원을 가지고 5일을 버틴 적이 있어요. 그 정도로 절박하고 막바지 코너에 몰렸었죠.

공백기를 가진 뒤 최근 영화, 드라마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데 최근 근황에 대해 궁금합니다.

공백기를 합치면 15년 정도... 너무 길었죠. 그러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고요. 예전에는“내가 최고다”하는 교만함이 컸던 반면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요.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사람들과 함께해야 되기 때문에 참고, 배려하고 있거든요. 예전에 비해 거만했던 것이 많이 꺾인 것 같아요. 공백기를 가진 후 다시 대중 앞에 선지 4년이 좀 넘은 것 같아요. 지난 2013년 SBS 주말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출연으로 다시 연기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연기를 하다 보니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웃음). 그런데 다행히 시청자분들께서 굉장히 재미있게 봐 주셨던 것 같아요. 시청자 분들의 반응이 좋아 분량도 늘어나게 됐고요. 그 후로 2016년 영화 ‘곡성’, 2017년 ‘길’, ‘장산범’ 등에 출연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영화 ‘장산범’ 이후로는 잠시 쉬고 있어요. 지금은 약간의 휴식기를 가지면서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독서도 틈틈이 하고 있고요. 스케줄이 없을 때면 피곤하지 않게 몸을 가꾸기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마냥 쉬는 편이예요. 좋은 음식이나 건강보조제를 먹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장시간 촬영을 하다 보니 체력 관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 ⓒ 시사연합신문

강부자 씨 추천으로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 출연하며 다시 활동을 재개 하셨는데.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촬영하기 전까지는 막말로 삶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을 때였어요. 당시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었는데, 20년 만에 강부자 씨를 만난 거죠. 공백기 영향이 컸던 터라 당시 방송가에서도 저를 반기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 때 강부자 씨가 ‘소리 없는 보증인’이 되어준 거죠.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는 구나’ 하고 고마웠던 마음이 너무나 컸어요.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부터 저를 건져 올려줬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요. 드라마를 집필하신 김수현 선생님과 정을영 감독님께서도 좋은 대본과 역할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뿐이었죠.

 

공백기를 가진 후 많이 힘드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은혜를 잊지 말라, 정직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지금도 후배들에게 이 말은 종종 해주고 있는데, 이것만 잘 지켜도 그 사람의 자산이 되거든요. 공백기를 겪는 동안 이런 것을 많이 느낀 것 같아요. 예전만 해도 “내가 최고다”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위치에서든 최고는 없어요. 그저 서로 함께 배려하고 참아주면서 더불어 사는 거죠. 그게 좋은 삶이고, 제대로 된 삶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후배들이 잘 따르고 해서 정을 줬다가 상처를 받은 적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정을 쉽게 안 주려고 하는데, 그게 또 마음처럼 되지가 않아요(웃음). 기본적으로만 잘 해주려고 하는데, 그래도 후배들은 무조건 사랑해주고 받아주는 스타일이예요. 야단을 두 번만 쳐도 떠나려고 하는 것이 후배거든요. 항상 후배 입장에서도 생각하고 보듬어 주려 노력하고 있어요. 또 지금은 길을 지나가다 모르는 사람이 저를 향해 미소만 지어줘도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될 정도로 여유를 갖게 되었고요.

다양한 작품이나 배역이 들어오고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배역이 있으시다면.

배우 ‘허진’을 생각하면 한 번에 저를 떠올릴 수 있는 인생 작품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연기 생활을 하면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작품, 나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은 꼭 1편 정도는 남기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요. 그것은 작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저의 이야기 일수도 있어요. 엄마의 입장에서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나, 딸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한 여자의 입장에서 삶에 대해 회고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요. 또 이제는 우는 역할은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극중에서도 우는 역할을 많이 맡았지만 실생활에서도 많이 울었기 때문에 이제는 대중들에게 웃음을 주는 역할을 많이 하고 싶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중년 로맨스를 다룬 작품에도 출연하고도 싶습니다. 관객 분들의 입장에서도 많이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을 해 보고 싶어요.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예전에 어느 수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어요. “희망 하나만 있으면 살 수 있다”라고요. 제가 힘들었을 때는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또 매일같이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 말을 일절 하지 않게 되었어요. 예전에 어느 지인 분께서 저에게 산삼 세 뿌리를 주시면서 “힘을 내서 활동해 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어요. 산삼은 가족에게도 선뜻 내어주기 쉽지 않은 건데 그런 선물을 받고 어떻게 나쁜 생각을 계속 할 수가 있겠어요. 그런 고마운 분들 때문이라도 앞으로도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죠. 지금 와서는 후회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아요. 만약 옛날로 돌아간다고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아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도 같고요. 좁은 단칸방에 살아도 좋은 사람을 만나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은 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진정한 내 편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어요. 또 제가 남에게 사랑을 준 적이 많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여유가 생겨서 인지 사랑을 많이 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향후 활동 계획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오랜 공백기가 사람을 참 왜소하게 만든 것 같아요. 현재 소속사가 없어 혼자서 모든 것을 다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가끔 벅찰 때가 있어요.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을 하고 올인을 하고 싶은데 뒷받침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 아쉽긴 해요. 예전과 지금의 방송 시스템을 비교해 보면 요즘은 약간 인간미가 없어 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좀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 다독이면서 힘을 내자고 하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그런 인간미가 많이 없어진 반면 방송 시스템이나 제도적인 부분은 많이 좋아진 것 같고요. 현재는 일이 끊이지 않게 연기를 계속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 이예요. 공백기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오게 된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마음도 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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