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한국인 복서 황충재. 지금 그는 환경가수협회장으로 나무심기릴레이운도에 전념하고 있다@시사연합신문
의지의 한국인 복서 황충재. 지금 그는 환경가수협회장으로 나무심기릴레이운도에 전념하고 있다@시사연합신문

1981년 2월. 13전 전승의 가도를 달리며 당시 듀란에게 타이틀을 빼앗은 슈가레이레너드와 일전을 앞두고 있었던 무적의 복서...

그런 그가 지금은 가수로 전향. 조명빛 무대를 링 삼아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환경단체의 환경가수협회 회장으로 거듭나 나무심기릴레이운동에도 적극적이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Q. 황충재씨, 반갑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모습은 여전하군요...

먼저 시사연합신문 구독자분들께, 그리고 황충재씨 팬들을 위해 인사한 말씀 해주시죠…….

A. 먼저 반갑습니다. 시사연합신문을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독자 분들과 아직도 저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가정과 직장에도 최고의 건강과 축복과 사랑이 넘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 드립니다.

Q. 황충재씨,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또한,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됐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A. 네. 은퇴한 이후에 KBS 복싱 해설을 약 13년 정도 했는데 시드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변정일 후배에게 넘기고 그 이후에는 제가 양복을 좋아하다보니 피렌체 양복점이라고 약 10년 이상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월들은 이것저것 하다가 지금은 가수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Q. 황충재씨, 복싱은 언제 시작하셨습니까?

A. 제가 복싱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떤 계기로 권투가 좋아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정말 그 뭐라고 말해야 되죠.  그때는 권투선수가 되어서 금메달을 따고 하는 이러한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학생때 그 뭐있잖아요.  요즘으로 말하자면 사나(짱)이 되는거...(웃음)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었나봐요.  어느 순간에 보니까 국가대표가 돼 있고 아시아 주니어대회 금메달, 킹스컵,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가수 황충재@시사연합신문
가수 황충재@시사연합신문

Q. 이제 기억이 가물거리겠지만 그 시절 이야기좀 해야겠네요. 레너드와의 타이틀매치 진행과 관련해서 당시 상황을 생각 나는 대로 이야기좀 들려주시죠...

A. 그때는 제가 동양 타이틀 13차 방어전을 성공했을 때인데요, 제가 22 전승 19KO 라는 전 적을 갖고 WBC의 1위가 쿠에바스, 제가 2위 그리고 WBA 1위는 황충제, 2위가 쿠에바스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통합 챔피언은 슈가레이 레너드가 통합 챔피언 이였습니다.

그런데 룰이 한 체급에서 1위를 하면 6개월 안에 챔피언 도전권이 주어지는데 슈가레이 레너드가 통합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WBA 1위 WBC의 1위끼리 붙어서 결적을 해야 되는데 쿠에바스가 저하고 시합을 일곱 번을 연기를 했습니다.

그때는 선수가 진단서를 제출하면 한두 번 정도는 연기가 가능하기는 했는데, 쿠에바스가 계속해서 시합을 거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호세 슐레이만 회장이 재임 중이고, 기구가 멕시코에 있다 보니까 이런 파워있는분들이 시합을 안시켜준거죠...

그래서 결국 제가 슈가레이의 도전자로 결정이 됐습니다. 파이트머니 또한 그때 돈으로 약7억.  정말 그때로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말 행운아였죠.

그러나 다른 곳에서 비운의 일이 발생한 거죠.  그때 제가 동양타이틀 13차 방어를 성공하고 있었고 같은체급 동양랭킹 1위가 황준석 선수였습니다.  제가 동양타이틀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세계 타이틀 가기 전에 몸을 풀고 간다는 생각으로 동양타이틀매치를 받아줬어요.

상대가 한국선수이고 그때로서는 제가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며, 세계챔피언이 되기 위해 몸을 최상으로 만들었거든요.  황준석 선수를 좀 쉽게 생각했던 거죠.  뭐 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황준석 선수에게 14차 방어에 실패하고 이어 계속 슬럼프에 빠졌죠. 그래서 은퇴를 하고 그런 가슴 아픈 그런 기억이 있는데 죄송합니다.(웃음)

Q. 당시 팬들은 빅 매치가 성사되지 않아 큰 아쉬움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본인은 상심이 크셨을 텐데. 당시 어떠셨습니까?

A. 정말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 마음을 누가 알아줄 수도 없는 일이고...

저는 그때 권투선수로서 정말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결과가 나오다 보니까 이런 일을 주변에서 어떻게 이해할까요.

그냥 뭐랄까~ ‘황충재 권투 잘하고 세계타이틀매치 준비는 다 됐는데 전초전에서 졌구나, 참 안타깝다’ 이런 정도는 생각해주지만, 디테일하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는 힘들죠.

생각해보세요. 시저스팔레스 호텔이라는 곳에서 세계적인선수 슈가레이하고 60개국에 라이브로 생중계되고, 또한 도전자가 7억이라는 파이트머니를 받는(지금 환산하면100억~120억 추산) 정말 엄청난 결전이었는데 그 현실이 깨져버렸습니다.

제가 가장 큰 실수를 한 것은 큰 시합을 앞에 두고 안 해도 될 시합을 한 것이 가장 뼈아픈 일이 되어버렸는데 지금도 항상 생각하지만 ‘프로선수들은  백지장 한 장 차’이라는 크나큰 경험을 이때 얻었습니다.

自慢은 이렇게"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러한 현실을 본인 아니고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술 한 잔 마시고 나면 마음이 그 순간만은 참 편안한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그때부터 술이라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까지 좋아하고 있습니다.(웃음)

Q. 은퇴이후 새로운 길을 선택 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의외의 길을 선택하셨어요. 직접소개 좀 해주시죠?

A. 복싱을 은퇴하고 제가 옷 입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피렌체라는 양복점을 약 10년 넘게 운영을 했습니다. 그때 KBS 조영남 쇼라는 프로가 55분 생방송이었는데 이때는 방송의 힘이 어머어마 할 때입니다.

김대중 정권 때였는데 방송 중에 정치인 중 옷 잘 입는 사람을 꼽으라고 하기에 박지원 대변인을 뽑았죠. 그랬더니 그 다음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박지원 대변인을 처음 만난 기억이 있고 이때 청와대 구경도 처음 했습니다.

Q. 요즘 설운도씨 작품의 노래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노래인지 타이틀곡 소개도 좀 하시죠.

A. 노래를 하게 된 동기는, 제가 술을 좋아하다 보니까 술집에 가면 노래를 부르잖아요. 가수 남진 형님과 자리를 같이하는 시간 있었는데, 어느 날 ‘충재야 너 노래한번 해봐라’ 하시며 '설운도가 곡을 잘 쓴다며 친구이니까 한번 부탁해봐라' 하시기에 설운도 친구에게 부탁을 했는데, 우연치 않게 또 다른 친구가 ‘뻥이야’ 라는 소재를 제공했어요. 이렇게 첫 곡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 노래가 "뻥이야"라는곡인데 제가 노래를 해야만 되는 운명 이었나봐요...(웃음)

에코인 환경가수 오디션에 출연한 가수 황충재 @시사연합신문
에코인 환경가수 오디션에 출연한 가수 황충재 @시사연합신문

Q. 요즘 환경단체 환경 가수로 활동 하시던데 소개 좀 해주시죠.  어떤 환경 단체입니까?

A. 제가 소속된 환경단체는 환경감시국민운동본부라는 곳인데요. 연혁이 20여년된 NGO단체죠. 다른 환경단체도 많이 있지만 이곳의 특징은 현재 2050탄소배출 저감운동에 가장 먼저 앞장을 서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탄소저감운동으로의 일환으로 ‘범국민 나무심기릴레이운동’을 전개하고 있죠.  또한 환경가수 오디션 개최를 통해 나무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저도 환경가수로 활동도 하고 있지만 ‘에코인 환경가수협회 회장’으로 또한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Q. 이제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생의 1막2장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선택하신 길이 후회스럽지 않길 바라면서 각오 한 말씀 해주시죠...

A. 네,  정말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웠는데, 어쨌든 노래를 시작해서 그래도 이 나이에 뭔가 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지금은 내가 주어진 가수로서 그리고 혹시 저를 잊지 않는 팬들에게 좀 더 기쁨을 주는 그런 황충재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ND

전설의 복서에서 전설의 가수로 그 이름을 남기기 위해 최선 다할 터

70년대 복싱기린아 황충재 선수, 당시 국민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 국민들의 가슴을 달래주던 스포츠는 김일, 천규덕의 레슬링, 그리고 홍수환의 4전5기 신화의 복싱 이였다.

남자들의 심금을 울리던 한국의 대표 스포츠 복싱. 이때가 복싱의 중흥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황충재는 당시 엘리트코스 복싱 선수로 승승장구하며 13차례 방어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그가 1982년 생각지 않던 선수를 만나 불의일패를 당하면서 그는 뜻하지 않게 인생의 전환점을 맞고 말았다.

이제 그는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레전드라는 수식어를 붙여 보지만 그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반전의 또 다른 반전으로 오뚝이처럼 우리 앞에 다시섰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선수로 뛰고 있다고 말한다. 나를 응원하는 팬들을 위해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한다.  복싱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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